安市城의 위치

 

高句麗 安市城이 있던 곳은 고대에 中國王朝와 遼東王朝가 서로 차지하려고 한 아주 중요한 軍事 要衝地였다. 이 安市城의 위치에 대하여 여러 견해가 있는데, 우리나라 史學者 대부분은 遼陽 西南 방면으로 보고 있다. 이는 遼史地理志 등에 安市城이 東京 西南 60리에 있다고 적혀 있는 것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철주 건무군은 자사를 두었다. 본래 한나라 안시현인데 고구려 안시성이다. 당태종이 공격하였지만 점령하지 못하였다. 설인귀가 흰옷을 입고 올라갔다는 성이 이곳이다. 발해는 주를 두었고, 위성, 하단, 창산, 용진 4현이 있었다. 호수 1천이고, 동경 서남 60리에 있다. 거느리는 현이 1개인데 탕지현이다. 鐵州 建武軍 刺史 本漢安市縣 高麗為安市城 唐太宗攻之不下 薛仁貴白衣登城 即此 渤海置州 故縣四 位城, 河端, 蒼山, 龍珍, 皆廢. 戶一千 在京西南六十里 統縣一 湯池縣 遼史 卷三十八志第八 地理志二 東京道

 

新唐書 高句麗傳에 의하면 遼東郡 安市縣은 고대의 鴨淥水(遼河) 下流에 있었다. 고대에는 鴨淥水(遼河)가 渾河와 만나 지금의 渾河下流 방면으로 흘렀다.

 

「고구려에 마자수가 있는데 말갈의 백산에서 나온다. 물의 색이 기러기 머리색이라서 압록수라 부른다. 국내성 서쪽으로 돌아 염난수와 합쳐 서남으로 흘러 안시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有馬訾水 出靺鞨之白山 色若鴨頭 號鴨淥水 歷國內城西 與鹽難水合 又西南 至安市 入于海」新唐書 高句麗傳

 

그런데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太祖大王 3년조나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에 의하면 安市城은 遼東이 아닌 遼西에 있었다.

 

「태조대왕 3년(A.D 55년)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병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三年 春 二月 築遼西十城以備漢兵」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조대기>에서 말하였다. 태조 융무 3년 요서에 10성을 쌓고 이로서 한나라의 10성에 대비케 하였다. 안시는 개평부 동북 70리에, 석성은 건안의 서쪽 50리에, 건안은 안시의 남쪽 70리에, 건흥은 난하의 서쪽에, 요동은 창려의 남쪽에, 풍성은 안시의 서북 100리에, 한성은 풍성의 남쪽 200리에, 옥전보는 한성의 서남쪽 60리에, 택성은 요택의 서남쪽 50리에, 요택은 황하가 북류하는 곳의 왼쪽(동쪽)에 각 있다. 5년 봄 정월 또 백암성과 용도성을 쌓았다. 朝代記曰 太祖隆武三年 築遼西十城 以備漢十城 一曰安市城在開平府東北七十里 二曰石城在建安西五十里 三曰建安在安市南七十里 四曰建興在灤河西 五曰遼東在昌黎 六曰豊城在安市城西北一百里 七曰韓城在豊城南二百里 八曰玉田堡舊遼東國在韓城西南六十里 九曰澤城在遼澤西南五十里 十曰遼澤在黃河北流左岸 五年 春 正月 又築白岩城埇道城」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위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문구에 의하면 安市城은 遼西 즉 開平府 東北 70리에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史學界는 桓檀古記는 僞書이므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史學界 通說대로 安市城과 建案城이 遼河보다 동쪽에 있을 경우 麗唐戰爭 戰況과 맞아들어갈까?

麗唐戰爭 戰況에는 建安城은 남쪽에 있고 安市城은 북쪽에 있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遼河 동쪽에서는 東으로 진군하여 遼河를 건너는 征伐軍으로서는 遼東半島 남쪽이 북쪽보다 더 後方이 되므로, 만약 安市城과 建安城이 遼河보다 동쪽에 있을 경우 唐軍은 남쪽에 있는 建安城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북쪽에 있는 安市城을 지나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다시 말하면 만약 安市城과 建安城이 遼河보다 동쪽에 있을 경우 征伐軍은 補給路와 後軍路가 차단당하는 상태에서 敵陣 깊숙이 들어가 建安城을 공격해야 되므로, 다른 성보다 建安城을 먼저 공격할 수 없다. 뒤집어 말하면 唐나라 征伐軍이 建安城을 먼저 공격했다는 것은 建安城과 安市城이 遼河 동쪽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玄谷集 등에는 鳳凰城이 安市城이라고 적혀 있다.

 

鳳凰城 或曰安市城 或曰莒州城 安市則楊萬春之所守  玄谷集 卷五

其七 高麗舊疆踔遠矣 鳳城或云是安市 千秋大膽楊萬春 箭射虬髯落眸子 若道南漢形勝弱 文皇何如洪太始 安巿城三淵集 卷十一

安市城 距柵門十里 城在鳳凰山上 山三面周抱 峯皆戌削刺天 超邁欲飛 南一面稍平可門 高句驪方言以鳳凰爲安市 故名安市城 唐太宗動天下兵 親征靑莊館全書 卷六十六

爲見鳳凰城 迂回十里 歷安市城 城在鳳凰山中 唐太宗親征高麗時 此城屢月不下 爲守將楊萬春射中左目 及其回軍 萬春登城拜謝 太宗賜絹百匹 此載金富軾三國史 而通鑑及唐史所不記也  夢經堂日史編

燕記曰。或曰此卽安市城也。高句麗方言。稱大鳥曰安市。今方語。或訓鳳凰曰安市。稱蛇曰白巖。隋唐時沿國語。以鳳凰城爲安市城。以蛇城爲白巖城。其說頗似有理。又世傳安市城主楊萬春。射帝中目。帝耀兵城下。賜絹百匹。以賞其爲主堅守燕轅直指卷一

自宿站發行纔二里 遠見羣山削立 乃安市城舊基也 史稱唐太宗征遼時 駐兵于此 城將楊萬春 堅守不戰 拜辭於城上 唐宗遂薄城攻之 終不能拔 或曰 東明王所築 或曰 安市城在益州地東北四十里 似是訛傳也 安市山城多白雲 城根山勢遠無分 飛車亂礮終何賴 唐帝東來謾駐軍薊山紀程卷一

 

그 외 耳溪集이나 考 등에도 鳳凰城이 安市城이라고 적혀 있다. 이는 遼史地理志 등의 영향을 받은 것 같으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建安城과 安市城은 遼河보다 동쪽에 있을 수 없으므로, 鳳凰城은 麗唐戰爭 戰況에 나오는 高句麗 安市城이 아니다.

高句麗 安市城의 위치를 찾기 위하여 三國史記 高句麗本紀와 新唐書 문구를 살펴본다.

 

「당제가 말하기를 "내가 듣기로는 안시성은 지세가 험하고 군사들이 날래 막리지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킬 수 없어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건안성은 험한 것을 믿고 양식은 많으나 군사는 적으므로, 부시에 나가  치면 서로 돕지 못할 것이다. 건안성이 함락되면 안시성은 내 배 안에 있는 것과 같다". 이세적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양곡은 요동에 있는데 서쪽으로 건안성을 치러가면 적(고구려군)은 우리의 귀로를 막을 것입니다. 먼저 안시성을 치는 것만 못합니다.". 당제는 "맞다"고 하고 그렇게 공격토록 하였다. 帝與勣議所攻 帝曰 "吾聞安市地險而眾悍 莫離支擊不能下 因與之 建安恃險絕 粟多而士少 若出其不意攻之 不相救矣 建安得 則安市在吾腹中"勣曰 "不然 積糧遼東 而西擊建安 賊將我歸路 不如先攻安市" 帝曰 "善" 遂攻之」 新唐書 列傳第一百四十五  東夷 高麗

「이세적이 대답하였다.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으며, 우리 군량은 모두 요동에 있는데 지금 안시성을 지나쳐 건안성을 쳤다가, 만약 고구려 사람들이 우리 군량 길을 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여 안시성이 떨어지면, 북 치며 나아가 건안성을 빼앗는 것이 낫겠습니다. 對曰 建安在南 安市在北 吾軍糧皆在遼東 今踰安市而攻建安 若麗人斷吾糧道 將若之何 不如先攻安市 安市下 則鼓行而取建安耳」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新唐書 列傳 高麗 문구와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문구를 보면, 唐帝와 李世勣이 建安城과 安市城 공격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 이때 唐帝는 李世勣에게 建安城을 먼저 점령한 후 安市城을 치자고 말하고, 李世勣은 이에 반대하면서 建安城은 남쪽에 있고 安市城은 북쪽에 있으며, 우리 軍糧은 모두 遼東城에 있는데, 지금 서쪽으로 安市城을 지나 建安城을 치면 (安市城에 있는) 고구려 사람들이 우리 軍糧 길을 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한다. 이 말을 한 장소는 遼東城에 이어 白巖城을 점령한 후이니 아마도 白巖城일 것이다.

唐帝와 李世勣의 말에 의하면 白巖城보다 서쪽에 安市城이 있고, 安市城보다 서쪽에 建安城이 있다. 또 安市城은 북쪽에 있고 建安城은 남쪽에 있다는 麗唐戰爭 戰況 문구로 보아 安市城은 建安城의 바로 동쪽이 아니라 동북쪽에 있었다.

麗唐戰爭 戰況에 의하면 唐帝가 간 遼東城은 遼陽 방면이 아니라 난하 동쪽 昌黎의 남쪽 방면이다. 따라서 安市城이나 建安城은 난하 동쪽 昌黎보다 서쪽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安市城의 위치는 어디일까?

三國史記 雜志 地理에는 安市城은 옛 安寸忽 혹은 丸都城이라고 적혀 있다.

 

「安市城舊安寸忽(或云丸都城) 안시성은 옛 안촌골이다. 혹은 환도성이라고도 한다.」三國史記 雜志 第六地里

 

그러나 그곳의 위치에 대한 설명은 나오지 않는다. 安市城의 위치는 찾을 수 없으므로 安市城의 동쪽에 있는 白巖城의 위치와 安市城의 서남쪽에 있는 建安城의 위치를 살펴본다.

먼저 白巖城의 위치를 살펴본다.

麗唐戰爭 戰況을 보면 唐帝는 遼東城을 점령한 후 그 남쪽에 있는 白巖城을 항복받았다.

 

「이세적이 백암성 서남방으로 진공하고 唐帝가 그 서북쪽에 이르니, 성주 손대음이 몰래 심복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성에 이르러 칼과 도끼를 내던지는 것을 신표로 삼고 “저는 항복하기를 원하지만 성 안에 따르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고 말하였다. 당제가 당나라 깃발을 사자에게 주며 “정녕 항복하려고 한다면 이것을 성 위에 세워라.”고 말하였다. 대음이 깃발을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은 당군이 이미 성으로 올라온 것으로 여기고 모두 그를 따랐다. 李世勣進攻白巖城西南 帝臨其西北 城主孫代音 潛遣腹心請降 臨城投刀鉞爲信曰 奴願降 城中有不從者 帝以唐幟與其使曰 必降者 宜立之城上 代音立幟 城中人以爲唐兵已登城 皆從之」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白巖城 위치에 대하여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에는 遼東城 남쪽 碣石山 아래에 白岩城이 있다고 적혀 있다(舊志云 遼西在昌遼縣 唐時改遼州 南有碣石山 而其下則白岩城). 碣石山은 난하 방면에 있었으므로, 桓檀古記 高句麗國本紀 문구에 의하면 遼東城이나 白巖城은 난하 방면에 있었다.

麗唐戰爭 戰況을 보면 白巖城 북쪽에 있는 遼東城 인근에 馬首山이 있었다. 前漢書地理志를 보면, 馬首山은 漢나라 遼西郡 西部都尉 치소인 柳城縣 서남에 있었고, 漢나라 때 遼西郡 西部都尉 치소인 柳城縣은 난하 방면에 있었다.

 

 遼西郡 秦置..屬幽州..縣十四..柳城馬首山在西南..西部都尉治 前漢書地里志

又柳城在府西二十里 一云在府東北二十餘里 讀史方輿紀要 卷十七 直隸八 永平府 遼西城

 

遼東城, 馬首山이 난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므로, 따라서 麗唐戰爭 戰況에 나오는 遼水는 난하이다. 즉 麗唐戰爭 戰況에 나오는 遼東城은 遼陽 방면이 아니라 난하 동쪽 昌黎 방면에 있었고, 白巖城은 그 남쪽에 있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建安城은 白河에서 난하 바로 동쪽 昌黎 방면에 있는 遼東城 사이에 있다. 그리고 安市城은 建安城에서 遼東城 사이에 있다. 이를 보면 安市城은 난하 바로 동쪽 昌黎 방면에 있는 遼東城보다는 서쪽에 있고, 唐山 境內로 추정되는 建安城의 東北쪽에 있다. 따라서 安市城은 난하 중.상류 방면에 있었다.

다음으로 建安城의 위치를 살펴본다.

唐書 張儉 列傳을 보면 張儉은 A.D 645년 2월 11일 唐帝와 같이 洛陽을 출발하여 幽州로 가던 도중 3월 24일 定州를 지나 保定 동북 150리에 있는 新城지 갔을 때  唐帝로부터 遼東으로 가서 莫離支를 遙擊하라는 명령을 받고 4월 초 遼水를 건너 4월 5일 建安城을 공격하여 高句麗 軍士 수천명을 죽였다.

 

「張儉字師約 京兆新豐人..中略..太宗將征遼東 遣儉率蕃兵先進略地 至遼西川漲久未度 帝以為畏懦 召還 見洛陽宮 陳水草美惡山川險易 并久不進狀 帝悅 拜行軍總管 使領諸蕃騎 為六軍前鋒 時高麗候者言莫離支且至 帝召儉自新城路邀擊 虜不敢出 儉進度遼 趨建安城 破賊 斬數千級」 新唐書 張儉 列傳

「前略. 太宗將征遼東 遣儉率蕃兵先行抄掠 儉軍至遼西 為遼水汎漲 久而未渡 太宗以為畏懦 召還 儉詣洛陽謁見面陳利害因說水草好惡 山川險易 太宗甚悅仍拜行軍總管 兼領諸蕃騎卒 為六軍前鋒 時有獲高麗候者 稱莫離支將 至遼東 詔儉率兵 自新城路 邀擊之 莫離支竟不敢出 儉因進兵渡遼 趨建安城 賊徒大潰 斬首數千級.後略」舊唐書 張儉 列傳

二月庚戌上自將諸軍發洛陽..중략..癸亥(2.24)上至鄴..중략..是月 李世勣軍至幽州 三月丁丑(3.9)車駕至定州..중략..壬辰(3.24)車駕發定州 親佩弓矢 手結雨衣於鞍後 命長孫元忌攝侍中 楊師道攝中書令 李世勣軍發柳城 多張形勢 若出懷遠鎮者 而潛師北趣甬道 出高麗不意 夏四月 戊戌朔 世勣自通定濟遼水 至玄菟 高麗大駭 城邑皆閉門自守 壬寅 遼東道副大總管江夏王道宗將兵數千至新城 折沖都尉曹三良引十餘騎直壓城門 城中驚擾 無敢出者 營州都督張儉將胡兵為前鋒 進渡遼水 趨建安城 破高麗兵 斬首數千級 太子引高士廉同榻視事 又令更為士廉設案 士廉固辭 丁未(4.10)車駕發幽州..중략..壬子李世勣 江夏王道宗攻高麗蓋牟城 丁巳(4.20)車駕至北平 癸亥李世勣等拔蓋牟城 獲二萬餘口 糧十餘萬石資治通鑒 卷第一百九十七 唐紀十三

 

唐帝가 張儉에게 遼東으로 가서 莫離支를 遙擊하라고 명령을 내린 일자는 불명이지만, 3월 24일 定州를 지나 新城까지 200여리를 가는데 4-5일 정도 걸렸을 것을 감안하면 唐帝와 張儉이 新城에 도착한 시기는 3월 28-29일 경이 되었을 것이다. 이를 보면 張儉은 3월 28-29일경 新城을 출발하여 불과 2-3일만인 4월 1일에 遼水를 건넜고, 그로부터 4일 후 建安城을 공격하였다. 그렇다면 張儉이 新城에서 출발하여 2-3일만에 도착한 遼水는 아무리 동쪽으로 잡아도 白河를 넘어설 수 없고, 그로부터 4일 이내에 도착한 建安城은 白河에서 난하 사이를 벗어날 수 없다. 古記에는 이곳이 唐山 境內라고 적혀 있다. 이를 보면 新唐書에 "安東都護府(漢나라 襄平縣) 서쪽 300리에 建安城이 있다"는 문구는 安東都護府가 平州 또는 遼西故郡[모두 난하 바로 서쪽이다.]에 있을 때 해당되는 문구이다. 이를 후에 新唐書를 만들 때 遼陽 방면의 安東都護府 문구에 짜깁기하여 적다보니 마치 建安城이 遼河下口 또는 遼河 서쪽에 있었는 것처럼 잘못 적혀 있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建安城은 白河에서 난하 바로 동쪽 昌黎 방면에 있는 遼東城 사이에 있다. 그리고 安市城은 建安城에서 遼東城 사이에 있다. 이를 보면 安市城은 난하 바로 동쪽 昌黎 방면에 있는 遼東城보다는 서쪽에 있고, 唐山 境內로 추정되는 建安城의 東北쪽에 있다. 따라서 安市城은 난하 중.상류 방면에 있었다.